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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 상식

스윙재즈와 빅밴드


스윙재즈(Swing Jazz)는 대중적 환호를 기반으로 뉴올리언즈에서 태동되었던 여러 경향들을 확고히 재즈로 만들었다. 그러나 즉흥연주는 당시까지 대중적인 관심을 끌 정도로 재즈를 지배하지 못했다. 이 당시 재즈적인 요인을 결정짓는 우선 요소는 바로 스윙감이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감상자가 음악을 듣고 저절로 흥에 겨워 박수를 치거나 몸을 움직여 춤을 추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대중들은 댄스 홀에서 춤을 추기 위한 음악으로 스윙재즈를 환영했다. , 많은 사람들은 집이 아닌 댄스 홀에서 춤을 추며 스윙 재즈를 몸으로 느꼈던 것이다.

 

이처럼 춤을 위한 용도로 음악이 만들어지고 연주되었기 때문에 밴드의 편성은 많은 대중을 압도할 만한 음량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출력을 증폭시키는 기술적 자재들이 없었던 만큼 연주자의 숫자를 늘리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뉴올리언즈 시대의 소규모 편성은 스윙 시대에 이르러 10명 이상의 연주자로 구성된 대규모 편성으로 바뀌게 되었고, 때문에 스윙 시대를 빅밴드(Big Band)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탄생한 밴드의 음악을 기반으로 빅밴드라고 부를 만한 편성의 그룹이 나온 것은 192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움직임은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백인 밴드보다 상대적으로 인종차별에 시달리고 음반 취입이나 방송 출연 기회도 적었던 흑인 밴드에서 일어났는데, 초창기 빅 밴드를 이끈 대표적인 음악인으로 플레처 헨더슨(Fletcher Henderson)이 있었다헨더슨이 이끈 빅밴드는 비록 백인 밴드의 매너리즘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유능한 편곡자 돈 레드먼을 기용해 백인 밴드보다 더 꼼꼼한 구성의 편곡으로 된 곡들을 연주하면서 휘하 연주자들에게 짧지만 자유로운 솔로 연주의 기회를 부여했다.

 

금주법과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이들 빅밴드의 수요는 날이 갈 수록 증가했는데, 물론 그 뒤에는 마피아 같은 조직폭력배들의 범죄 행위가 있었다. 마피아는 경찰들의 눈을 피해가며 고객들에게 술을 팔았고, 지하에 불법 클럽을 만들어 세심하게 손님들을 가려냈다. 손님들은 술을 마시는 것 외에 분위기를 돋울 음악을 원했고, 빅밴드는 여기에 딱 맞는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피아니스트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이 이끌던 코튼 클럽(Cotton Club)의 전속 악단은 음악적으로도 상당히 주목 받는 유명 밴드가 되었고, 엘링턴의 빅밴드는 이국적인 향취를 내는 독특한 정글사운드를 선보이거나 유능한 솔로 연주자를 끊임없이 영입하는 등 밴드 음악의 통일성과 재즈의 자유로움을 적절히 융합시켜 재즈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2차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수많은 음악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징집되어 입대하게 되면서, 많은 인원을 필요로 하는 빅밴드의 입지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또 인기에 연연해 매일 그 밥에 그 나물인 곡들을 연주하는 것에 싫증을 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재즈는 댄스 음악이라는 도식에 반기를 든 뮤지션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빅밴드의 유행은 점차 시들해졌다.

 

1960~70년대에는 신좌파의 득세에 힘입어 진부한 기존 재즈에 반기를 든 새로운 형태의 빅밴드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곡을 만들거나 체 게바라 등에게 바치는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고, 거의 클래식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40~50명 규모의 대규모 편제와 다양한 악기 편성을 취해 더 급진적인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프리재즈의 실험 정신과 퓨전 재즈의 상업성에 반기를 든 뉴트래디셔널 재즈 혹은 컨템퍼러리 재즈가 등장했고, 이에 따라 2차 대전 이전의 빅밴드 음악을 리바이벌하거나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 출처: 재즈,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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